내가 본 예술, 체육을 다루는 영화, 콘텐츠들은 기본적으로 딜레마를 가지고 있다. 안정적인 삶을 살 것인가. 나의 꿈을 위해 나아갈 것인가 이 영화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딜레마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보통 주인공은 그 딜레마의 중심에 있다. 조 가드너 처럼. (학교 정규직의 안정적인 삶 vs 재즈 예술가로서의 삶)
그리고 이 글에서 이제 현실의 삶, 죽음 이전의 생활은 잠시 접어 두고, 죽고 난 후의 사후 세계에 대한 디즈니 정의를 살펴보자. 그들이 표현하는 사후는 매우 단순하다. 종교적으로 보는 권선징악이니 윤회가 사후에 있다는 인식이 들지 않게 끔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죽음 이전의 철학 그러니까 삶의 시작에 대한 이 영화에 대해 말해보자.
이 부분에 대해서 나의 얕은 철학적 지식으로 태어나는 이들에 대한 세계를 말해보려고한다.
나는 17년에 대학에 입학했고, 16년도에 생활과 윤리, 윤리와 사상으로 탐구과목 교차 지원했다. 이러한 교육과정에서는 죽음 이후의 에피쿠로스, 플라톤의 이데아 등, 죽음 이후를 다루는 사상은 교육과정에 있었으나,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 대한 철학, 고찰은 부족하다는 생각을 이 영화를 통해서 자각 해볼 수 있었다.(생각해보면 롤스의 무지의 베일 정도다. 그래서 적어도 나는 출생 이전에 대한 철학을 한국 교육과정에서 배운 기억이 없었다. 그리고 이를 현세를 살아온 이들, 기성세대에 대한 정신적 위안에만 치중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이는, 아이 키우기 힘든 나라, 아이를 키우기 꺼려지는 나라라는 오명의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라는 과대망상도 해본다.)
내 개인적인 디즈니에 콘텐츠 제작에 대한 생각을 적어보려고 한다.
콘텐츠로 동심을 일으킨다. 그렇다고 동심만을 지향하지 않는다. 테리의 대사 중 사망자의 수가 맞지 않는다는 대사와 함께 하루 약 15만명이 죽음을 맡는다는 대사를 한다.
링크를 통해 그의 대사가 현실의 통계와 대략 일치함을 엿볼 수 있었다.
또한, 이 영화는 심리학적으로도 접근을 하려고 했다. 로르샤흐 잉크 반점이라던가, 정신분석의 아들이라고 지칭(내 개인적 생각이다.) 할 수 있는 카를 융을 등장시킨 점 (관련학과 전공했는데 아는 이야기들이 나와서 좋았다.) 그리고 비참여적 내담자, 22에 대한 특성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죽음 이후의 이데아가 아닌, 교육을 받아야 하는, 사회화가 이뤄지지 않은 이들에 대한 이데아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이 영화의 콘텐츠로 볼 수 있었다. 내가 청소년일 때 주위 어른이 그런 말을 하더라. 중, 고등학교 때, 책임 질 일이 없을 때 많은 경험을 해보라는 말이었다. 이것 자체가 청소년의 특권이다. 만일 이 글을 청소년이 읽고 있다면, 최대한 많은 일을 최대한 젊을 때 해보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싶다.
(영화에서, 유스 아카데미에서는 그 많은 경험을 아무 부담없이 하고 있지만, 현실은 조금 다르다. 어느 정도의 부담을 가진다. 하지만, 성인과 비교하면, 청소년의 기회와 경험은 영화에서 표현하는 기회와 거의 다를 바 없다. 꼰대 같지만, 가정에, 혹은 개인적으로 돈이 있어도, 없어도, 많은 경험을 그 나이에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22의 아지트(?) 창고(?) 에 아주 많은 언어로 인삿말로 보이는(hello, 안녕하세요) 멘토들의 이름표로 디즈니의 다문화 감수성을 엿볼 수 있지 않았나 생각했다.
디즈니의 상상력을 22의 대사 "다른 세상에 간 것 처럼(무아지경Trance)" 의 형상화로도 엿볼 수 있었다. 예체능 해 본 선생님들은 알 거다. 무아지경이라는 상태는 존재한다. 적어도 22가 긴장감과 실수가 용납되기 어려운 실제 무대에서 그가 방해를 하지 않더라도, 실제 무대와에서 반대로 실수가 허용되는 연습 중에 22는 종종 나타난다. 연습과, 몰입으로 설명되는 무아지경을 종교적으로, 그리고 서양의 회사가 불교의 무아지경을 표현했다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신비주의자. 나는 문윈드의 존재를 히피로 정의했다. 사회의 정의에 무관하게 배를 조종하는 이들로 나름대로 정의 했다. (배는 육상의 자동차와 반대로 더 자유롭고, 더 모험적인 이미지가 더 강하다.)
그리고 그들이 처음 카메라에 비칠 때 괴물을(?) 치유한다. 그리고 그들의 정체는 대부분 자본주의에 찌들은 펀드 매니저이며, 문윈드는 이번에도 펀드매니저라며, 푸념을 한다.
나는 여기서 신비주의자, 즉, 자본주의와 사회에 찌들지 않은 이들의 순기능을 볼 수 있었다. (적어도 이 영화의 시각에서)
그리고 22와 (조가드너), 조 가드너는는 현생으로 돌아온다. 조 가드너는 고양이의 몸으로 이미 현생에 대한 장점을 알고 있었지만, 22의 (조 가드너의 몸)은 점차적으로 현생의 즐거움으로 배우게 된다. 남들이 생각하기에 보잘 것 없는 피자에 대한 맛의 깨달음일지라도.
그리고 어찌저찌 조가드너는 정신과 몸을 통일시킨다. 그리고 꿈에 그리던 무대를 이뤄내지만, 만족스럽지 않다.
나는 이 영화 소울을 좋아한다. 내가 모두 풀어쓰면 재미가 없어지는 철학이 있고, 그 철학을 모름에도 재밌게 볼 수 있는 표현력이 있다. 적어도 디즈니의 소울의 씬에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죽음 이후의 생활, 죽음을 맞이한 이에 대한 이야기(디즈니의 자의적 해석이 있음에도 수긍할 만큼 잘 각색 된), 죽음을 체험하고, 삶의 유한성에 대해 자각한 이에 대한 이야기, 삶의 모든 순간이 즐거움이 아님을 깨달은 이에 대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그리고, 즐거움은 멀리 있지 않다는 것도. 22가 피자라는 작은 매개체를 삶을 선택하겠다는 거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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